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혐오와 수치심 (문단 편집) ==== 수치심은 법적 근거가 되는가?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A1%B0%EB%A6%AC%EB%8F%8C%EB%A6%BC.jpg]]|| ||<:>[[이정재(조직폭력배)|수치심 처벌의 대표적인 예시.]]|| 앞에서 설명했듯이, 타인의 혐오를 받아서 자기 자신의 취약성을 깨닫게 된 사람은 수치심을 느낀다. 하지만 수치심은 누구나 꺼리는 정동이며, 따라서 사실상 모든 사람들은 법의 이름으로 시민들이 수치심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시민 간의 관계에서 상호존중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범죄자가 처벌 과정에서 느끼는 수치심은 괜찮은가?'''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 그것은 단순히 모욕을 준다기보다는 범죄자를 계도한다는 건설적인 의미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것처럼, [[성범죄자 알림e|성범죄자의 인적사항과 주소지를 온라인에 공개적으로 게시]]하거나, 음주운전자의 차량에 적발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 그 사례다. 물론 검찰 조사 전에 포토라인에 용의자를 세우고 그나마도 [[마스크]]를 벗기거나, 성범죄자가 [[전자발찌]]를 차고 밖에 나가게 만드는 것 역시 그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범죄자의 얼굴에 낙인을 찍거나 범행사실을 [[문신]]으로 남기는 자자형(刺字形)과 같은 형벌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게 [[정의구현]]일까?''' 반대로, [[유흥탐정]]처럼 지탄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사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경우가 있다면, 판사는 그 사람을 [[의적]](?)으로 취급하여 봐 줘야 하는가? 물론 이처럼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범죄예방 효과에 있어서는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저자 역시 그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수치심 처벌에 대해서 법학계에는 '''다섯 가지의 반론'''이 존재한다. '''첫째''', 제임스 휘트먼(J.Whitman)은 수치심 처벌이 일종의 [[인민재판]]이 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사법 제도가 처벌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군중이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처벌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 에릭 포스너(E.Posner)는 수치심 처벌은 사법 현장에서 신뢰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처벌의 대상자를 명확히 특정하지 못하고, 처벌의 강도도 확정하지 못하는 애매한 처벌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로마]]에서 낙인 형벌은 처음에는 범죄자에게만 가했지만, 이후에는 모든 이교도들에게까지 마구잡이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셋째''', 제임스 길리건(J.Gilligan)은 수치심을 느낀 사람이 그 [[주홍글씨]]로 인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재범률이 증가한다고 하였다. 특히 이런 처벌을 받는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자 등 유독 자아가 약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취약한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아예 반사회적인 집단에 합류할 수도 있다고. '''넷째''', 스티븐 슐호퍼(S.Schulhofer)는 수치심 처벌이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여 [[전체주의]]적인 사회를 만든다고 하였다. 물론 이는 전체주의가 나쁜 것이라는 다른 철학적 전제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케이헌처럼 수치심 처벌이 '[[리버럴]]' 한 대의를 위해 쓰일 수 있다는 주장에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반론으로서, 저자는 수치심 처벌이 '''범죄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해치려는 의도가 깔린 처벌'''이라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처벌은 '당신은 나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라고 표명하지만,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당신은 결함을 지닌 사람입니다' 라고 표명한다"(p.420). 수치심 처벌은 범죄자를 공개적으로 비웃게 만드는데, 이는 국가가 범죄자를 포함하는 모든 시민들을 존엄한 인격체로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심지어 그 비웃음의 대상에는 범죄자의 가족들까지도 포함될 수 있으며, 이는 수치심 처벌의 옹호자들로서도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니다. 저자는 수치심 처벌이 도입되면 그 국가는 '''비난 받는 취약한 사람들과 그들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사람들로 서열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 비웃는 사람들은 자신 또한 자칫하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평범한 시민이라는 점을 애써 회피하며 나르시시즘적인 응보논리를 부르짖게 되고, 범죄자의 부도덕을 비난함으로써 자신만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현대의 법치국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범죄자의 행위는 처벌하지만 그 범죄자의 인격은 존중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행위에 대한 처벌이 설령 가혹할지라도 그것이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유독 수치심 처벌과 같은 대중의 [[조리돌림]]이 호소력을 갖게 되는 사회적 풍조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것이 바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이라고 하였는데, 이 개념은 70년대 영국의 폭력범죄 사례를 연구한 스탠리 코언(S.Cohen)의 《Folk Devils and Moral Panics》 에서 출발한다. 도덕적 공황은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그 사회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원시적, 본성적인 것이 문명을 위협한다는 인식]]이다. 기존 사회의 도덕관념이 사라져 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문명에서 야만으로 변해 간다고 믿을 경우, 사법 절차에서 수치심 처벌이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실제로 70년대 영국에서 [[조직폭력배]] 문제로 한창 도덕적 공황이 판을 치던 시절에는, 법정에서 심지어 범죄자의 바지 허리띠를 빼앗아서 판결을 받는 동안 계속 바지가 흘러내리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의 [[호모포비아|게이에 대한 혐오]] 또한 성적인 것에 관련된 도덕적 공황의 대표적인 사례다. 게이 활동가이자 《The Trouble with Normal》 의 저자 마이클 워너(M.Werner) 또한 반동성애 현상을 '섹스 공황'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 도덕이 무너진다는 공황에 빠져 있던 시절, [[공연음란죄]]로 가장 먼저 잡혀들어갔던 사람들은 가장 으슥한 곳에 숨어 있던 게이들이었다고. 처벌이 수치심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한다면, 도대체 처벌은 범죄자에게 어떤 정동을 일으켜야 하는가? 앞서 혐오 대신에 분노를 제안했던 것처럼, 저자는 이번에도 더 나은 정동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죄책감]]'''이다. 이는 혐오와 분노의 관계와도 상당히 대응된다. 앞에서 '''인간의 본질 그 자체를 문제삼는지 아니면 잘못된 행위만을 문제삼는지'''를 구분했던 것을 상기해 보자. 수치심은 범죄자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의미 자체가 부정당하게 만들며, 아무런 희망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을 준다. 물론, [[국민정서법|당장 뭇 사람들은 범죄자가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환호하겠지만]], 사실 이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재기하지 못하고 끝내 사회의 변두리 또는 밑바닥을 떠돌다가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 있다. 그때에는 이 사람을 범죄의 유혹으로부터 막아 줄 건강한 자아상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 실현적 예언|역시 이 사람은 우리와는 종자가 다른 쓰레기였다]]' 면서 자신들의 나르시시즘을 확증할 것이다. 반면, 범죄자가 느끼는 죄책감은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이지만 잘못된 행위를 저질러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한다. 따라서 범죄자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전에 저질렀던 행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범죄자가 언론에 등장할 때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를 한 채 손을 수건으로 가리는 [[클리셰]]적인 풍경이 법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흔히들 범죄자 인권만 보호하고 피해자 인권은 무시하냐고 항의하긴 하지만, 거기서 범죄자의 인상착의를 있는 대로 드러내 버리면 그 범죄자는 '''죄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수사당국은 그때부터는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가 끼친 악영향을 밝히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한 명의 인격체를 쥐 잡듯 짓밟는 것이 되고 만다. [[2차 가해|피해자 인권이 흔히 경시된다는 문제]]는 물론 국내 수사당국의 고질적인 문제이지만, 양측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꼭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이쪽도 보호하고 저쪽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떤 유명인이 수사를 받거나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던 도중에 대중으로부터 [[조리돌림]]을 당해서 사회적 평판이 크게 깎였다면, 설령 죄가 있다고 인정되더라도 그 수치심이 반영되어 최종 형량이 감소하기도 한다. 본서 말미의 해제에서 [[김영란(법조인)|김영란 교수]]는[* 흔히 [[김영란법]]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서강대 법학대학원 석좌교수이며,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페미니즘 진영에는 국내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라는 기록으로도 알려져 있다.] [[성범죄자 신상공개제도]]와 [[전자발찌]]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선고2010헌바I87결정; 선고2011헌바I06/I07(병합)결정)을 소개한다. 여기서는 '범죄자의 수치심은 처벌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부수적 결과물일 뿐' 이라는 의견이 다수의견이었는데, 소수의견이 본서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는 만큼, 향후 국내 법학계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요청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수치심이 긍정적일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4장에서 저자는 이것을 '건설적 수치심' 이라고 부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지배적 집단이 피지배 집단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수치심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갑]]이 [[을]]의 비참한 처지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좋은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미국인]]이 "우리 미국 사회에 [[빈부격차]]가 이렇게나 큰데도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었다니, 대졸자로서 내 자신이 정말 수치스럽다" 고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수치심이 긍정적인 이유는, '나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다' 라는 비현실적 [[나르시시즘]]을 가정하지 않고서,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의 더 현실적인 자아상을 스스로에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외에도 '''법 이외의 영역에서 수치심이 중립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을 강화하지도 않고 깨뜨리지도 않는 수치심이 존재한다. 예컨대, 어떤 [[축구]] [[코치(스포츠)|코치]]가 전반전을 마친 선수들에게 "이건 용납할 수 없는 경기력이다, 응원하는 팬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라" 라며 다그치는 경우가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감이 저해될 위험이 있다고 덧붙인다. 결국 여기서의 요지는,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자신이 어느 정도의 도덕적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하고 부끄러워하는 건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사람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더욱 내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자는 수치심과 관련하여 굉장히 중요한 이슈로서 '''[[장애인 차별]]'''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본서는 [[여성]]이 겪는 수치심에 대한 논의보다도 [[장애인]]이 겪는 수치심에 대한 논의에 한참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저자가 장애인 이슈를 강조하는 이유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지닌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낙인을 받아 온 사회 집단은 없었"(p.550)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의 논리가 흥미로운데, 범죄자와 배심원의 관계를 '죄 지은 사람과 죄 지을 수 있는 사람' 으로 보는 것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특이한 신체적 한계가 있는 사람과 일반적인 신체적 한계가 있는 사람' 의 구도로 배치한다. 저자가 전제하는 것은, '''어차피 모든 사람들은 신체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100미터를 15초만에 끊지만, 누군가는 20초만에 끊는다. 아예 자동차가 달리듯 내달릴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이런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전거, 자동차, 지하철, 기차 등이 만들어졌지만, 그런 것을 이용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10미터를 걷기 위해 몇 분 이상이 필요한 지체장애인들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사람들은 그것은 특별하게 바라본다. '''똑같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인데도 말이다.''' 물론 장애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에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우선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 모로 신경이 쓰이게 만들고, 끊임없이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도리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금 '''세상에 완벽히 자립 가능한 정상인은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모든 시민들은 저마다 "유능하면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p.563)' 라는 것이다. 비장애인들도 늘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간다면, 장애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전혀 냉대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또 다른 이유로서, 장애인들의 외모나 외양이 아름답지 못하고 다소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솔직한) 생각이 있다. 물론 이 역시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취약성을 상기시키는 오염물 같은 느낌'''이라고 해석될 것이다. 그 느낌 때문에 장애인을 멸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클래식한 의미에서의 [[혐오]]가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장애인들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며, 이들이 장애로 인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면, 사회는 '''마땅히 그들을 돕기 위해 환경을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지, 장애인은 '우리와 비교해서 비정상' 이라는 혐오적 인식이 그 사회적 재설계를 가로막고 있을 뿐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